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계 프랑스인 (문단 편집) == 문화 == [[파일:95E0E518-CFB4-4079-B41C-89E4A87818B9.jpg]] * [[니스]]의 정교회 성당 > 프랑스 남부의 [[안톤 체호프|체호프]]식 저택들에선 구 러시아 귀족들의 목가적인 생활을 연상시키는 주말 파티가 열렸다. 혁명 전에는 서구식 생활 방식을 익히고 교회에 가본 적이 없던 러시아인들도 이제 망명객으로서 고향 풍습과 정교 신앙에 집착했다. 망명객들은 마치 자신들의 개성에 집착하듯이 모국어에 집착했다 (...) 러시아적인 것에 대한 강조는 망명객들과 그들이 망명한 나라 사람들 간의 상호 적대감으로 강화되었다. 특히 프랑스인들과 독일인들은 러시아인들을 전쟁으로 해체된 경제의 야만적 기생자로 본 반면, 가난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프랑스인이나 독일인보다 훨씬 지적이었던 러시아 난민들은 자신들이 (대개 귀족 출신이므로) 프랑스와 독일의 "[[부르주아|프티 부르주아지]]"보다는 뛰어난 유형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 > 파리 망명객들의 러시아 민족주의 활동의 의의는 표트르와 예카테리나의 제국 문화의 정수였던 귀족적 가치를 부활시켰다는 데 있었다. 파리에서의 러시아식 발레 공연은 러시아 난민 문화생활의 중심이었다. 파리의 발레 공연장은 일종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르네상스의 파리 대사관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향유하는 문화가 실용 예술과는 다르게 "어떤 형태로든 민주적인 일탈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고" "귀족적 정신"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파리 망명객들이 무엇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니체]]가 비판했던 "예술을 위한 예술"의 가치였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은 현실도피를 원하는 망명객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망명객들 대부분이 속해 있던 귀족 문명은 혁명으로 파괴되었고 그들은 서유럽에서 두 번째 고향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망명객들은 자신들이 러시아의 특권 엘리트로서 향유했던 지위를 상실했다는 사실 때문에 동요했다. 난센 여권과 외국인 등록증을 가진 명문 귀족의 후손들은 서구 국가 내에서 자신들이 "이등시민"으로 취급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 > 나탸샤 댄스 : 러시아 문화사 / 올랜도 파이지스 저 프랑스계 러시아인 상당수가 러시아인 귀족 계층이자 반볼셰비키 성향으로 러시아 정교회 보수성향이 강했었다. 그러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회의주의 및 세속주의 문화가 전반적으로 강했던 프랑스 사회 특성상 이들도 점차 동화되어 오늘날 프랑스 내 정교회 교세는 미미한 편이다. [[니스]]와 [[파리(프랑스)|파리]] 등에 정교회 성당이 있으나 규모가 크지는 않다. 오늘날 러시아계 프랑스인들은 교회 같은 시설들보다는 니스, 파리 등지의 러시아계 수입 식료품점을 가면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식료품점이나 식당 같은 시설은 사실상 프랑스인에 완전 동화된 러시아계 프랑스인 외에도 러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나 난민, 관광객 등도 모이기 때문에 사실상 프랑스내 러시아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프랑스의 유명 홍차 브랜드 쿠스미티(Kusmi Tea)는 원래 러시아에서 홍차를 판매하는 업체였으나, 러시아 혁명 당시 사업체가 싹 날아가고 프랑스로 망명한 쿠스미쵸프(Kousmichoff) 오너 일가가 다시 프랑스에서 업체를 재건했다고 한다. 1972년 파산했었으나 2003년 다른 사람들이 경영권을 사들인 이후 부흥하는데 성공했는데, “러시아 황실에서 마시던 전통 홍차” 마케팅이 주효했다고 한다. ~~[[헤센의 알릭스|혁명 직전 러시아 황실이 콩가루 가족이었던 건 넘아가자]]~~[* 이와는 별개로 러시아 혁명 당시 해외로 망명한 러시아인 중 황실 복권을 주장하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었고, 막장 황실이라고 해도 여기에 애착과 향수를 느끼던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일부 무슬림 [[타타르인]]들이나 러시아계 유대인들도 이 당시 일부 이주하였으나, 유대인들의 경우 [[홀로코스트]] 당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887년 [[비텝스크]] 주에서 출생한 유대인 화가 [[마르크 샤갈]]은 본인은 나치 독일의 마수로부터 무사했지만 대신 1941년 고향이 나치 독일에게 점령되어 유대인 거주자들이 거의 다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3년 후 다음과 같은 애도문을 남겼다. > 그대를 마지막으로 보고 내가 그대의 울타리로 둘러싸인 거리에 있었던 이후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나는 그대와 함께 살았지만 아직 나의 그림 중엔 그대의 기쁨과 슬픔이 반영된 한 장의 그림도 존재하지 않는다. 요즘 들어 나는 끊임없이 나의 고향 도시가 나를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근심에 사로잡혀 있다. 미국으로 망명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자신의 러시아에 고향에 놔두고 온 저택을 이상화하면서 노년을 스위스에 한 호텔에 거주하며 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샤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신이 유대인인 것을 숨기고 공부했을 때부터 어렸을 적 자신의 고향이었던 비텝스크를 이상화했다. 여타 러시아 난민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인 그에게 있어서도 고향은 그저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예술적 장소로 신화적 이상이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샤갈이 [[벨라루스]]에서의 삶을 어떻게 그렇게 그리워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20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타타르인들의 경우 별 다른 특별한 통계 결과가 없어 완전히 동화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외에도 러시아 제국 및 소련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프랑스에 정착한 경우도 꽤 된다.[*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 문서 참조] 2020년 10월 프랑스 교사 [[사뮈엘 파티 피살 사건]]의 범인은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난민 신청한 체첸인 가정 출신이라고 한다. 러시아에서는 해당 극단주의자와 러시아 사이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부정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